11월, 2019의 게시물 표시

憧憧往来 朋从尔思

憧憧往来 朋从尔思 易曰:憧憧往来,朋从尔思。子曰:天下何思何虑? 天下同归而殊涂,一致而百虑,天下何思何虑!日往则月来,月往则日来,日月相推而明生焉。寒往则暑来,暑往则寒来,寒暑相推而岁成焉。往者屈也,来者信也,屈信相感而利生焉。尺蠖之屈,以求信也;龙蛇之蛰,以存身也;精义入神,以致用也;利用安身,以崇德也。过此以往,未之或知也,穷神知化,德之盛也。 易曰:困于石,据于蒺藜,入于其宫,不见其妻,凶。子曰:非所困而困焉,名必辱;非所据而据焉,身必危。既辱且危,死期将至,妻其可得见邪? 易曰:公用射隼于高墉之上,获之无不利。子曰:隼者,禽也;弓矢者,器也;射之者,人也。君子藏器于身,待时而动,何不利之有?动而不括,是以出而不获,语成器而动者也。 子曰:小人不耻不仁,不畏不义,不见利不劝,不威不惩。小惩而大诫,此小人之福也。易曰:履校灭趾,无咎。此之谓也。 善不积,不足以成名,恶不积,不足以灭身。小人以小善为无益而弗为也,以小恶为无伤而佛去也。故恶积而不可掩,罪大而不可解。易曰:何校灭耳,凶。 子曰:危者安其位者也。亡者,保其存者也。乱者,有其治者也。是故君子安而不忘危,存而不忘亡,治而不忘乱。是以身安而国家可保也。易曰:其亡!其亡!系于苞桑。 子曰:德薄而位尊,知小而謀大,力小而任重,鮮不及矣!易曰:鼎折足,覆公,其形渥,凶。言不胜其任也。 子曰:知几其神乎!君子上交不谄,下交不渎,其知几乎?几者,动之微,吉之先见者也。君子见几而作,不俟终日。 易曰:介于石,不终日。贞吉。介如石焉,宁用终日?断可识矣!君子知微知彰,知柔知刚,万夫之望。子曰:颜氏之子,其殆庶几乎?有不善未尝不知,知之未尝复行也!易曰:不远复,无只悔,元吉。 天地缊,万物化醇。男女构精,万物化生。易曰:三人行,则损一人,一人行,则得其友。言致一也。 子曰:君子安其身而后动,易其心而后语,定其交而后求。君子修此三者,故全也;危以动,则民不与也;惧以语,则民不应也;无交而求,则民不与也;莫之与,则伤之者至矣。易曰:莫益之,或击之,立心勿恒,凶。

八卦成列

八卦成列,象在其中矣;因而重之,爻在其中矣。刚柔相推,变在其中矣。系辞焉而命之,动在其中矣。吉凶悔吝者,生乎动者也;刚柔者,立本者也;变通者,趣时者也。吉凶者,贞胜者也;天地之道,贞观者也;日月之道,贞明者也;天下之动,贞夫一者也。 夫乾,确然示人易矣!夫坤,聩然示人简矣! 爻也者,效此者也!象也者,像此者也;爻象动乎内,吉凶见乎外,功业见乎变,圣人之情见乎辞。 天地之大德日生,圣人之大宝曰位;何以守位曰仁,何以聚人曰财,理财正辞、禁民为非曰义。 팔괘가 열을 이루니 상이 그 속에 있고, 팔괘를 중첩시키니 효가 그 가운데 있다. 강유가 서로 밀어내니 변화가 그 속에 있다. 계사 속에서 주제를 찾아내니 변화의 이치가 그 속에 있다. 길흉회린은 움직임에서 나오고, 강유는 근본을 확립하는 것이며, 변통은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다. 길흉은 올바름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요, 천지의 도는 올바르게 보는 것이며, 일월의 도는 올바르게 밝히는 것이니, 천하의 움직임은 올바름 하나이다. 건은 뚜렷하여 쉽게 보여 주며, 곤은 유순하여 간명하게 보여준다! 효는 이것을 본받은 것이요! 상은 이것을 본뜬 것이다. 효와 상은 안에서 움직이고, 길흉은 바같으로 드러난다. 공을 세우고 사업을 이루는 것은 변화에 달려 있으며, 성인의 마음은 사에서 드러난다. 천지의 큰덕을 生이라 하고, 성인의 큰 보배를 位라 한다. 자리를 지키는 것은 仁이요, 사람을 모으는 것은 재물이며, 재물을 관리하고 언사를 바르게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나쁜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의라 한다.

自天佑之吉无不利

自天佑之吉无不利 易曰:自天佑之,吉无不利。子曰:佑者助也。天之所助者顺也;人之所助者信也,履信思乎顺,又以尚贤也。是以自天佑之,吉无不利也! 子曰:书不尽言,言不尽意。然则圣人之意,其不可见乎? 子曰:圣人立象以尽意,设卦以尽情伪,系辞焉以尽其言,变而通之以尽利,鼓之舞之以尽神。 乾坤其易之缊邪? 乾坤成列,而易立乎其中矣,乾坤毁则无以见易,易不可见,则乾坤或几乎息矣! 是故形而上者谓之道,形而下者谓之器,化而裁之谓之变,推而行之谓之通,举而措之天下之民谓之事业。 是故夫象,圣人有以见天下之赜,而拟诸其形容,象其物宜,是故谓之象;圣人有以见天下之动,而观其会通,以行其典礼,系辞焉以断其吉凶,是故谓之爻。 极天下之赜者,存乎卦;鼓天下之动者,存乎辞;化而裁之存乎变;推而行之存乎通;神而明之存乎其人;默而成之不言而信,存乎德行。 역에서 말하기를, “하늘이 도우니 길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했다. 공자가 말하기를 “하늘이 돕는 것은 순리이며, 사람이 돕는 것은 신의이다. 신의를 행하면서 하늘의 뜻을 생각하고 어진 이를 숭상하니, 하늘이 도와 길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했다. 공자가 말하기를, “글은 말을 다할 수 없고, 말은 뜻을 다할 수 없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성인의 뜻은 알 수 없다는 것인가? 공자가 말하기를, “성인은 상을 세움으로써 그 뜻을 다하고, 괘를 배열함으로써 묘사를 다하며, 계사로써 말을 다하고, 변통으로써 이로움을 다하며, 고무시킴으로써 신묘함을 다한다”라고 했다. 건곤은 역의 핵심이다. 건곤이 열을 이루니 역이 그 가운데 있다. 건곤이 훼멸되면 역을 볼 수 없다. 역을 볼 수 없다면 건곤이 거의 종식된 것인지도 모른다! 형이상을 도라 하고, 형이하를 기라 하며, 변화시키고 잘라버리는 것을 변이라 하고, 밀어붙여 실행하는 것을 통이라 하며, 그것으로 천하를 안정시키는 것을 사업이라 한다. 상이란 성인이 천하의 오묘한 비밀을 보고서 그것을 형용한 것이다. 그것과 비슷하므로 상이라 한다. 성인이 천하의 움직임을 보고서 그것을 회통시켜 전례로 삼았다. 계사로써 그 길흉을 판단하였기에 그것을 효라 한다. 우주의 비밀을 ...

양혜왕장구상

오르지 인의만이 제일   孟子见梁惠王。王曰:“叟!不远千里而来,亦将有以利吾国乎?”孟子对曰:“王!何必曰利?亦有仁义而已矣。王曰:‘何以利吾国?’大夫曰:‘何以利吾家?’士庶人曰:‘何以利吾身?’上下交征利而国危矣。万乘之国,弑其君者,必千乘之家;千乘之国,弑其君者,必百乘之家。万取千焉,千取百焉,不为不多矣。 苟为后义而先 利,不夺不餍。未有仁而遗其亲者也,未有义而后其君者也。王亦曰:仁义而已矣,何必曰利?” 왕이 말했다. "천리를 멀다 않고 찾아와 주셨으니, 역시 이 나라에 앞으로 이익을 주시려 함입니까? 맹자가 답했다. "왕께서는 하필이면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의가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 나라의 이익만을 생각하면 대신들은 내 집이 이로울까를 생각하며, 선비나 백성들은 제 한 몸의 이익만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윗사람이나 아랫사람 모두가 서로 이익만을 취하려 하면 나라는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 진실로 인의를 뒤로 미루고 이익만을 앞세운다면 모든 것을 다 빼앗지 않고는 만족할 수 없게 됩니다. 아직 어질면서 부모를 버린 사람은 없고 의로우면서 임금을 뒤로 돌린 사람은 없습니다. 왕께서는 오직 인의만을 말씀하셔야 합니다. 하필이면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현자의 즐거움   孟子见梁惠王。王立於沼上,顾鸿雁麋鹿,曰:“贤者亦乐此乎?”孟子对曰:“贤者而后乐此,不贤者,虽有此不乐也。《诗》云:‘经始灵台,经之营之,庶民攻之,不日成之。经始勿亟,庶民子来。王在灵囿,麀鹿攸伏,麀鹿濯濯,白鸟鹤鹤。王在灵沼,於牣鱼跃。’文王以民力为台为沼,而民欢乐之,谓其台曰灵台,谓其沼曰灵沼,乐其有麋鹿鱼鳖。古之人与民偕乐,故能乐也。汤誓曰:‘时日害丧,予及女皆亡。’民欲与之皆亡,虽有台池鸟兽,岂能独乐哉?” 오십 보 백 보   梁惠王曰:“寡人之於国也,尽心焉耳矣。河内凶,则移其民於河东,移其粟於河内。河东凶亦然。察邻国之政,无如寡人之用心者。邻国之民不加少,寡人之民不加多,何也?”孟子对曰:“王好战,请以战喻。填然鼓之,兵刃既接,弃甲曳兵而走。或百步而后止,或五十步而后止。以五十步笑百步,则何如?”曰:“不可,直不百步耳,...

노자 도덕경 23장

노자 도덕경 23장 希言自然。故飘风不终朝,骤雨不终日,孰为此者? 天地。天地尚不能久,而况于人乎? 故从事于道者同于道, 德者同于德; 失者同于失。 同于道者,道亦乐得之; 同于得者, 德亦乐得之; 同于失者,失亦乐得之。信不足焉,有不信焉! 소리 없는 소리로 자연은 말한다. 그러므로 회오리바람은 아침을 끝내지 못하고, 소나기는 하루종일 내리지 못한다. 누가 이런 짓을 하는가? 천지로다. 천지도 영구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도에 종사하는 자는 도와 함께 하고, 덕과 함께 하는 자는 덕과 함께 지내고, 또 덕과 덕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은 그 잃은 것과 함께 한다. 도와 함께 하는 자가 있으면, 도 또한 그를 얻음을 즐거워하고, 덕과 함께 하는 자가 있으면, 덕 또한 그를 얻음을 즐거워하고, 잃은 것과 함께 하는 자가 있으면, 잃음 또한 그를 얻음을 즐거워한다. 믿음이 없으면 불신이 있을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장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古之真人不逆寡,不雄成,不谟士。 若然者过而弗悔,当而不自得之。 若然者等高不栗,入水不濡,入火不热。是知之能登假於道者也若此。 옛날 참사람은 역경을 거역하지 않았고, 성공을 자랑하지 않았으며, 아무 일이든 꾀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은 잘하지 못해도 후회하지 않았고, 당당해도 제 자랑을 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은 높이 올라가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물 속에 들어가도 젖지 않았고, 불에 들어가도 뜨겁지 않았다. 이는 지식이 자연의 도리에 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자병법 飘나부낄 표piao, 骤별안간 취zhou, 况하물며 황

노자 도덕경 22장

노자 도덕경 22장 曲则全,枉则直,洼则盈,弊则新;少则得,多则或。是以圣人抱一为天下式。不自见,故明;不自是,故彰;不自伐,故有功; 不自矜,故长。夫唯不争,故天下莫能与之争。故之所谓 “曲则全“, 岂虚语? 故成全而归之。 ”나무가 구부러져 쓸모가 없으면 온전하게 자라고, 사람도 몸을 굽협다 폈다 하면서 성장한다. 파인 구덩이에는 물이 흘러들고, 낡거나 헐게 되면 새로워지는게 세상 이치다. 욕심이 적으면 마음이 만족을 얻게 되고, 뭐든 많으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이래서 성인은 하나인 도를 안고 세상의 법이 된다. 스스로를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밝으며, 스스로 옳다 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드러나게 되며, 스스로 잘난 척 하지 않으니 공이 살아 있으며, 스스로 교만하지 않으니 남의 존경을 오래도록 받는다. 대체로 내가 다투려 하지 않으니 그러므로 세상도 나와 다투려하지 않는다. 옛날에 이르기를 쓸모없는 것이 온전하다는 말이 어찌 헛말이겠는가?. 진실로 생명을 온전히 하여 그 몸이 태어난 근원인 도의 세계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있고 없는 가운데 미혹됨이 없이 조화를 찾아야 한다. 균형과 조화를 강조하는 중(中)의 논리를 보자. 유교는 중용(中庸)이라 하고, 불교는 중도(中道)라 하며, 도교는 중화(中和)라 한다. 중용은 대립되는 양쪽을 다 긍정하며 조화를 모색하는 것이고, 중도는 대립되는 양쪽을 다 부정하며 조화를 찾는 것이고, 중화는 각각의 특성을 잘 살려 하나 되게 하는 것이다. 장자 대종사(大宗师)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知天之所为,知人之所为者至矣。知天之所为者天而生也,知人之所为者以其知之所知, 以养其知之所不知。终其天年不中道夭者是知之盛也。 자연이 하는 일을 알고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것이 최고의 앎이다. 자연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자연을 따라 자연 그대로 살아간다.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자는 자기가 이미 아는 것으로써 아직 모르는 것을 깨달아 나간다. 그리고 하늘이 내린 생명을 잘 보존하여 ...

노자 도덕경 21장

노자 도덕경 21장 功德之容,唯道是从。道之为物,惟恍惟惚。惚恍中有象,恍惚中有物。窈冥中有精,其精甚真,其中有心。自古及今,其名不去,以阅众甫。吾何以知众甫之状然哉以此。 “큰 덕의 모양은 오직 도를 따른다. 도라고 하는 것은 물(物)로 이루어진 오직 황홀의 세계다. 황홀해서 알 수 없는 가운데 형상이 있다. 어두컴컴한 가운데 정기가 있으니 그것은 순수무구(纯粹无垢)한 기운이다. 그 기운은 매우 신비스러운 것이라 그 가운데 믿음이 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도道)이 떠나지 아니하고 만물의 근원을 통솔한다. 내 무엇으로 만유(万有)의 형상을 알겠는가? 다만 이것(도)에 의해서다.” 물(物)과 상(象)의 차이는 물은 우주의 물질적 바탕이고, 상은 인식 활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근본형상을 가르킨다고 한다. 이 장과 관련 장자는 제물편(齐物篇)에서이런 말을 했다. "大道不称,大辩不言,大仁不仁,大廉不谦,大勇不忮。道照而不道,言辨而不及,仁常而不成,廉清而不信,勇忮而不成。五者圆而几向方矣。故知止其所不知至矣。孰知不言之辨,不道之道。若有能知,此之谓天府。 큰 도는 겨루지 않고, 큰 변론은 말로 하지 않으며, 큰 인은 어진 척하지 않고, 큰 청렴은 겸손한 척하지 않으며, 큰 용기는 남을 해치지 1않는다. 도가 드러나면 도가 아니고, 시비를 가리려는 말은 미치지 못하는 데가 있으며, 인이 한결같아서는 이루지 못하고, 청렴이 맑기만 하면 신뢰를 얻지 못하고, 용기가 남을 해치면 이루지 못한다. 이 다섯가지는 둥굴지만 모나기 쉽다. 그러므로 지식도 알지 못하는데(不知)에 이르러 머무는 것이 최고의 지식이다. 말하지 않고서도 밝힐 수 있는 말을 누가 알 것이며, 도라고 하지 않아도 도인 것을 누가 알 것인가(지식은 무한하고 생명은 한정되어 있으니 누구나 다 배우다 마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이를 능히 알수 있다면, 이를 두고 천부(도인)라고 할 것이다. ㅐ

노자 도덕경 20장

노자 도덕경 20장 绝学无忧。唯之与阿,相去几何? 善之与恶,相去若何? 人之所畏,不可不谓。荒兮,其未央哉! 众人熙熙,如享太牢, 如春登台。 我独泊兮,其未兆; 如婴儿之未孩。 傫傫兮,若无所归!众人皆有余,而我独若遗。 我愚人之心也哉 !沌沌兮, 俗人昭昭,我独若昏。 俗人察察,我独闷闷。澹兮,其若海,飂兮,无所止。众人皆有以, 而我独顽且鄙。 我独异于人,而贵食母。 “학문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 ”예“하고 대답하는 소리와 ”응“하고 대답하는 소리의 차이가 얼마나 되는가? 선과 악의 그 거리는 또 얼마나 되는가? 그러므로 사람이 두려워하는 바를 불가불 나도 두려워하니 학문의 허망함이여 그 다할 수 없음이여. 모든 사람들은 기뻐하는 모양이 진수성찬을 받는 듯하고 봄날 누대에 오른 것 같다. 그런데 나 홀로 고요하여 바깥 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갓난아이가 아직 감각이 싹 트지 않아서 웃을 줄 모르는 것과 같고, 지치고 지쳐도 돌아갈 곳이 없는 나그네와 같다. 모든 사람들은 다 여유가 있는데 나만 홀로 다 잃어버린 듯하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을 품고 있으니 그 무지함이여, 세속의 사람들은 영악한데 나 홀로 흐리멍덩하다. 세속의 사람들은 총명하게 일을 하는데 나 홀로 답답한 그 흔들림이여! 바다와 같고 바람이 머무르지 않는 것과 같다. 모든 사람들이 다 쓰임이 있는데 나 홀로 어리석고 나 홀로 비천한 존재 같다. 나는 홀로 남과 달라서 어머니, 즉 도에 의해 길러지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사람은 아는 것만큼 불행하고 고통의 깊이가 더해진다.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근심이 생길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는 자유롭게 사는 하나의 방편으로 배우는 것을 끊으라고 한다. 학문을 하여 분별이 생기면 관념의 세계에서 방황하게 되고 비교 속에서 혼란에 빠지게 됨을 경계한다. 선과 악도 사람의 이해가 상충될 때 구분되는 인위적인 평가에 지나지 않으니 이해가 바뀌면 악이 선이 되고 선이 악으로 변하는 것...

노자 도덕경 19장

노자 도덕경 19장 绝圣弃智, 民利百倍;绝仁弃义,民复孝慈; 绝巧弃利,盗贼无有。 此三者以为文不足,故令有所属;见素抱朴,少私寡欲。 성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들의 이익은 백배나 된다. 사랑을 끊고 의로움을 버리면 백성은 효도와 자애로움으로 돌아간다. 교활함을 끊고 이익을 버리면 도적이 있을리 없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문자적 표현만으로 부족하다. 그러므로 소속된 바가 있게 하여 순결하고 소박한 본성을 보고 근원을 안으며, 사심과 욕심을 적게 하는 것이다. 성지(圣智), 인의(仁义) ,교리(巧利)는 사람의 삶에 없어서는 안될 요소들이지만, 또 있어서도 안되는 것이라 한 마디 말로 뭐라고 전할 수 가 없는 것이다. 있어서도 안되고, 없어서도 안 되는 것들, 인간은 그 있고 없는 그 사이에서 그것들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좌우된다. 말이나 글로써 드러낼 수 없는 오묘한 삶의 문제, 그것은 오직 개인 스스로가 상황에 따라 결정하고 처리해야 할 개인적인 숙제다. 노자는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教)’라는 말로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말하고 있다.

노자 도덕경 18장

노자 도덕경 18장 大道废,有仁义; 智慧出,有大伪; 六亲不和,有孝慈;国家昏乱,有忠臣。 “큰 도가 사라지니, 사랑과 도의가 있게 되었고; 지혜가 나오니, 큰 거짓이 생겼다; 집안이 화목하지 못하면 효도니 자애니 하는 말이 나오고; 국가가 혼란에 빠지면 충신이 있게 된다.” 세상에는 결핍된 것에서 말이 나온다. 사랑이 강조되는 그 자체가 벌써 사랑이 없다는 불행의 소리이고, 충신을 운운하는 그 자체가 이미 역적이 있어 나라가 혼란하다는 증거이다. 이 장에 대해 정략론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인간의 존망이 걸렸을 때는 그 목적에 유효하다면 어떤 수단도 정당화된다.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때는 ’옳다, 그르다, 너그럽다, 가혹하다’하는 따위는 일체 고려할 필요가 없다. 목적은 수단을 미화시킨다. 시대와 상황에 합일되기를 주저하거나 그와 같은 일이 서툰 사람은 불행할 수 밖에 없고 어떤 일도 이룰 수가 없다. 이와는 달리 변하는 상황에 부합하고 변화의 흐름을 타는 사람은 원하는 일을 성취할 수 있다. 사람의 운이 좋으니 나쁘니 하는 말도 시대의 흐름을 타느냐 못 타느냐는 말과 같다”.

呻吟语- 냉담함 속에 무한한 것이 있다

냉담함 속에 무한한 것이 있다 ‘冷淡中有无限受用处。都恋恋炎热,抵死不悟,既悟不知回头,既回头却又羡慕,此是一种依膻附腥底人,切莫与谈真味。’ 냉담함 속에 무난하게 받아 쓰는 곳이 있다. 모든이가 뜨겁고 뜨거운 것만을 그리워하며 잊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러도 깨닫지 못한다. 또 이미 깨달았다 하더라도 머리를 뒤로 돌릴 줄 모른다. 설령 머리를 뒤로 돌릴 줄을 알아도 뜨겁고 혹독한 것에 연연해한다. 이러한 것은 일종의 짐승들의 노린내에 의지하고 있다가 다시 생선의 비린내를 더 보태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을 상대해서 인생의 참맛을 이야기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呻吟语- 눈과 귀에는 생각하는 기능이 없다

눈과 귀에는 생각하는 기능이 없다 耳目口鼻四肢有何罪过?尧、舜、周、孔之身都是有底;声色货利、可爱可欲有何罪过?尧、舜、周、孔之世都是有底。千万罪恶都是这点心,孟子耳目之官不思而蔽物,太株连了。只是先立乎其大,有了张主,小者都是好奴婢,何小之敢夺?没了窝主,那怕盗贼?问谁立大?曰大立大. 귀눈입코팔과다리는 무슨 죄가 있는가? 요임금과 순임금과 주공 그리고 공자 자신은 모두 알고 있었다. 명성, 여색, 재물 그리고 이익을 좋아하고 갖고자 하는 것에 무슨 죄가 있는가? 요임금, 순임금, 주공, 공자의 세상에서도 모두 그 사정을 알고 있었다. 천만 가지의 죄악은 모두 이런 마음이다. 맹자의 고자告子편에 “귀와 눈은 생각하는 기능이 없기 때문에 사물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라고 했는데 귀와 눈에 너무나 죄를 연루시키는 것이다. 다만 맹자는 “먼저 큰 것인 마음으로 사물을 판단하면 우두머리가 됨을 깨달아 작은 것인 귀와 눈이 모두 좋은 노비가 되는데 어찌 작은 것의 유혹에 감히 끌리겠는가? 도둑질한 물건을 숨겨 줄 사람이 없다면 왜 저 도둑을 두려워하겠는가? 누가 ”큰 것을 세우겠는가?“ 라고 물으면 ”큰 것으로 큰 것을 세우는 것이다."라고 할 것이다.